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중국 인민지원군 (문단 편집) == 중국 지도부의 격론 == [[1950년]] [[10월 1일]] 한국군 [[제3보병사단]]이 [[강원도]] [[양양군]]에서 처음으로 38선을 넘어 북진을 시작하자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갔다. 미 공군이 북한을 폭격하면서 북중국경의 영공을 자주 침범하면서, [[만주]]의 [[연변]] 지역을 오폭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미군이 북한 정권 뿐만 아니라 중공 정권을 겨냥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증폭되었다. 김일성은 전황이 밀리기 시작한 9월부터 다급히 중국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일단 중국 측은 건국한지 1년도 안된 정권이라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기 때문에 개입을 주저했고, 유엔군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이틀 후인 10월 3일 저우언라이는 "현재 조선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은 조선인들 간의 내전이므로, 남조선군이 38선을 넘는 것은 무방하나,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경우 이는 중국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겠다"는 최후 통첩성 성명을 내었다.[* 말이 최후통첩이지 사실상 내정 개입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한국군만 38선을 넘었어도 중국은 이미 개입 준비를 거의 다 마친 상황이었기에 저우언라이의 성명은 단순 블러핑에 불과했다.] 하지만 미국은 여세를 몰아 한반도의 통일을 시도하기로 결정하였고 미국의 주도 아래 아예 유엔군의 북진과 한국 통일을 결의하는 결의안이 10월 7일 유엔총회에서 통과된 후 서부전선의 유엔군도 10월 9일 본격적인 북진을 시작한다. 출병에 앞선 최종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순망치한]]이라는 고사를 인용하면서, "본토에서 싸우느니 조선에서 싸우는게 낫다"며 주전론을 내세웠고, [[저우언라이]]는 "유엔군이 북중국경에서 멈출지도 모르니 일단 개입은 자제하고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린뱌오]]는 "우리가 미국을 이기기는 힘들다."는 비관론을 각각 제시했다. 하지만 한반도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펑더화이]]는 "조선의 지형을 고려해서 신중히 작전을 세운다면 충분한 승산이 있다."고 마오쩌둥을 지지했고, [[주더]]가 여기 찬성함으로서 10월 8일 한반도 출병이 결정되었다. 이 참전결정은 중공 정권에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었는지 당시 중국의 5대 권력자이자 차세대 주자[* 당시 런비스와 비슷하게 차세대 주자로 꼽혔고, 결국 대권을 쥐는 [[덩샤오핑]]은 당시 충칭시장에 불과했다.]중 으뜸이었던 당정치국 상임위원 [[런비스]]는 참전에 관련된 업무을 맡아 격무에 시달리다가 1950년 10월 27일 46세의 나이로 [[과로사]]했다. 여기에는 또한 북한과 중국 사이의 의리도 작용했는데,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수세에 몰렸을 1946~48년 당시 북한 측은 공산당 고위인사의 가족들과 부상병들을 수용해주었고, 특히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에 쫓기던 중공군이 북한 지역을 피난처로 삼을 수 있게 해주었다. 1948년 가을의 만주 전역에서의 승전이 국공내전의 전환점이 되었으니, '''중공 측은 북한측이 유엔군에 두들겨 맞고 패망하는 것을 불구경 할 수도 없었다.''' 아울러 북한 지도부에는 [[김무정|무정]], [[김두봉]] 등 옌안 시절 중국공산당과 함께 일본에 맞서 싸웠던 조선인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만약 북한이 중국령이자 조선족 밀집지역인 [[연변]] 지역에 망명정부라도 세운다면, 소련이 이 지역을 북한에 할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유엔군에 직접 맞선다는 모양새가 되면 유엔에서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중국 정부의 노력이 수포가 될 수 있으므로, 참전군인은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조선 인민들을 가엾이 여겨 스스로 지원한" 자원병이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중국 정규군인 인민해방군과는 별도의 조직인 것처럼 "중국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출병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사령관 선임에도 난항이 있었다. [[마오쩌둥]]이 당초 사령관으로 고려했던 인물은 쑤위(粟裕)였다. 쑤위는 1920년대 [[난창 폭동]] 때부터 중국 공산당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른 역전의 지휘관이었고, [[국공내전]]에서도 화둥야전군 사령관, 제3야전군 부사령관 등을 역임했다. 1950년 1월부터는 [[장제스]]가 쫓겨간 대만 공격 준비의 총책임을 맡고 있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이 발발하고 이에 맞서 유엔군이 결성되자, [[마오쩌둥]]은 쑤위를 둥베이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한반도의 정세 변화에 대비하는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사령관으로 내정됐던 쑤위는 1950년 7월에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추가로 [[메니에르병]] 진단을 받아 치료를 위해 소련으로 이송되면서 임명이 불가능해졌다. 그 다음으로 고려된 인물은 [[린뱌오]](林彪)였다. [[린뱌오]]는 [[국공내전]] 당시에도 만주(둥베이) 전역의 지휘를 맡아 맹활약했고, 북-중 국경에 대기 중이던 병력들은 그가 수족처럼 지휘하던 제4야전군 예하 부대들이 대다수였다.[* 이 때문에 제4야전군 예하였던 제13병단이 1진으로 한반도에 출동하자, 유엔군 측에서는 중국 인민지원군 총사령관이 [[린뱌오]]일 것이라고 오인했다.] 그러나 [[린뱌오]]도 국공내전 시절 입은 부상의 후유증이 도져 [[국공내전]] 종식 후에는 공식 활동을 자제하고 칩거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와병 중인 쑤위를 대신해 [[린뱌오]]를 임명하고자 1950년 9월에 그를 불러들여 의견을 구했다. 불려나온 [[린뱌오]]는 미군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침공한다면 그때는 자신이 직접 나서겠으나, 압도적인 미군에 맞서 승산이 없는 한반도 출병에는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결국 [[마오쩌둥]]은 대안으로 시베이(西北)군구 사령관이던 [[펑더화이]]를 임명한다. [[펑더화이]]는 지적인 면에서는 쑤위와 린뱌오보다 한 수 아래라는 평가였으나, 좀 더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는 뚝심이 있었다. 예방적인 한반도 출병에도 찬성하고 있었으며, 압도적인 미군을 상대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매복과 은폐에 능한 중공군의 특성을 최대한 살리고 미군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 승산이 있다고 봤다. 그리고 이러한 예상은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